사진 : tvN '유퀴즈 온 더 블럭' 캡처


"어머니는 가방끈이 짧았지만, 상대에게 의무와 예의를 다하다 누군가 자기 삶에 함부로 오려 가려 할 때 단호히 거절할 줄 알았고, 내가 가진 여성성에 대한 긍정적 상이랄까. 태도를 유산으로 남겨주셨다."

김애란 작가의 책 '잊기 좋은 이름'의 한 구절이다. 일하는 엄마, 엄마를 바라는 아이. 그사이에는 엄마의 묘한 죄책감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아이만을 바라보는 엄마와 아이. 그 사이에는 묘한 희생에 대한 마음도 자리하기 마련이다. 그 어느 쪽도 답은 없다. 그 두 모습 그대로 '사랑'이다. 그리고 아이는 삶을 대하는 엄마의 태도에서 '무언가'를 배운다. 지난 2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윤여순 씨가 말했다.

윤여순 씨는 여성 최초로 대기업 임원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배우 윤여정의 동생이기도 하다. 윤여순 씨는 남편을 따라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교육공학으로 석·박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가 되었다. 모두 말렸다. "나이 마흔이 넘는 여자 박사는 대학에서도, 회사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말리는 이들의 이유였다. 하지만 윤여순 씨는 그 과정을 모두 마쳤다. "그래야 우리 엄마 딸인 것 같고 그래서"가 그의 이유였다.

사진 : tvN '유퀴즈 온 더 블럭' 캡처


돌아와서 프로젝트를 맡아 발표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LG 임원 분이 제안을 해주셨다. 회사에 들어간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데 그룹 연수원 원장님의 말씀이 귀에 꽂혔다. "교수를 하고 싶어하신다면서요, 왜 교수가 좋으세요? 기업은 일을 시작했으면 끝을 내야 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 곳입니다. 만약 이런 곳에 와서 일하시면, 전문성으로도 굉장히 발전하실 수 있고, 인간적인 깊이도 성장하실 수 있다고 봅니다"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에 발걸음을 향했다. 부장으로 대기업에 입사했다.

윤여순 씨의 입사 후 회사에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좋지 않았다." 윤여순 씨의 존재는 "너무 외계인" 같았다. 여자가 나이 마흔이 넘어서 부장으로 시작했다. 이는 어찌저찌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위기는 따로 있었다.

"제가 임원이 되어서 일이 재미있고, 열심히 잘하고 싶고 그랬어요. 그때 우리 딸은 3~4학년 될 때인데. '엄마 일 그만두면 안되냐'고 하더라고요. 한참 엄마를 찾을 때잖아요. 어느 날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꿈이 하나 있는데, 자기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가 미국에서처럼 쿠키 구워서 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 이야기 들어주는 엄마 였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사진 : tvN '유퀴즈 온 더 블럭' 캡처


"정말 일하는 20년 세월 중에 최대 고민이었어요. 다른 때, 일로도 어렵고 고민할 때가 많았지만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이걸 못들어주면 아이에게 결핍이 될 것 같은데 내 인생에서 아이를 희생시켜야 하나. 이런 갈림길에서 너무 고민을 하게 됐는데, 왠지 일을 해야할 것 같았어요. 그리고 일하면서도 잘 키울 수 있는 마음이 있었고요."

"그래서 딸하고 약속을 했죠. 엄마가 시간을 많이 내지는 못해도, 반드시 너가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엄마가 그 시간을 꼭 낸다. 그래서 돌아와서 정말 지켰어요. 어떤 때 회식하고 약간 취해서 왔을 때도 얘기하는 시간을 냈어요. 제가 집에서 주부로 아이에게 전념했을 때보다도 어쩌면 더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마음을 배운 것은 자신의 엄마에게서였다. 75살의 나이에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을, 대한민국 최초의 대기업 여성 임원을 키워낸 윤여순 씨의 엄마는 딸에게 물려준 것이 있었다.

사진 : tvN '유퀴즈 온 더 블럭' 캡처


"여러가지 어려운 고비를 다 넘기고, 오래 일할 수 있었던 건 다 어머니에게 배운 것 같아요. 우리 어머님이 30대에 딸 셋을 데리고 홀로 되셨어요. 학교 선생님을 하셨고, 작년 가을에 돌아가셨어요. 세상이 험난했겠죠.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았겠어요. 그런데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최선을 다하셨어요. 대충하시는 법이 없으셨어요. 어디 도움을 청하면 될 것 같고, 이런 것에 전혀 무관하신 분이셨어요."

"'내가 스스로 다한다' 독립심이 굉장히 강하신 분이었고, 그런 분이 사시는 걸 쭉 보고 자라다보니 그냥 그게 몸에 밴 것 같아요. 산 교육이었고, 저희에게 유전인자 같아요. 최고의 수준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서 한다. 그게 가장 큰 교훈이었던 것 같아요."

윤여정은 예능 프로그램 '택시'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을 "내 새끼 둘"이라고 했다. 그리고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스카 트로피를 들고 "아들들아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란다"라고 말했다.

윤여순 씨의 딸은 엄마를 이렇게 기억한다. "엄마는 저에게 엄마로서도 너무 좋았지만, 제일 친한 친구. 그래서 저에게 자존감이 뭔지도 가르쳐주시고, 스스로 제 길을 잘 찾게 된 것 같아요."

사진 : tvN '유퀴즈 온 더 블럭' 캡처


윤여순 씨는 일하는 여성 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일하는 여성에게 육아가 제일 큰 딜레마라는 것을 알기에 하는 말이다.

"일하는 엄마들이 열심히 살면서도 죄책감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일해서 아이가 희생되지 않나. 이런 죄책감이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 중에 좀 잘못될 수도 있고, 그건 일하는 엄마에게나 집에서 아이에게 전념하는 엄마에게는 똑같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일일 수도 있고요. 반드시 그게 일하는 엄마 때문에 생기는게 아닌데, 여성 후배들은 이런 고민을 막 눈물을 흘리면서 해요."

"학교 선생님께 불려갔는데, 선생님 첫 말씀이 '어머니가 일하셔서 그런지 아이가 몹시 주위가 산만합니다.' 사실 재미있는게 선생님도 일하시는 분이시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너무 많은 거죠. 사실 거기에서 벗어나고 엄마가 열심히 살면서 보여주는 그것이 산 교육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열심히 살면, 아이가 은연 중에 다 배우기 때문에요. 정말 일하는 여성들에게 저는 희망을 드리고 싶어요."

사진 : tvN '유퀴즈 온 더 블럭'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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