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스틸러] 장혜진, 이창동이 심고 봉준호가 꽃피운 '믿보배'
기사입력 : 2020.02.21 오후 4:53
세계를 사로잡은 '기생충'의 히로인 장혜진은 근래 가장 열일 행보를 보여주는 배우 중 하나다. '기생충' 이후 영화 '우리집', '니나 내나'에 출연했을 뿐 아니라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단편 드라마 '루왁인간'을 통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쉴 틈 없는 행보를 보여준 것.
장혜진 출연작 / 사진: 엣나인필름, 필라멘트픽쳐스, CJ엔터테인먼트, 리틀빅픽쳐스, tvN 제공

장혜진 출연작 / 사진: 엣나인필름, 필라멘트픽쳐스, CJ엔터테인먼트, 리틀빅픽쳐스, tvN 제공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1기생인 장혜진은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연극학도였다. 이후 1998년 박용하, 김현주 주연의 영화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에서 단역으로 데뷔하며 본격적인 연기 생활을 시작하는가 했으나, 결혼과 출산을 겪으며 연기를 포기하게 됐다.

그런 그를 다시 연기판으로 데려온 건 이창동 감독이었다.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장혜진은 이창동 감독과의 인연을 언급했다. 그는 "이창동 감독님이 '밀양'에서 사투리 쓰는 여배우가 필요하다고 오디션을 보라고 하셨다"며 "10년 전 감독님의 영화 '박하사탕' 오디션에서는 떨어졌지만, 감독님이 학교 교수님이기도 하고 인사를 드릴 겸 '밀양' 오디션에 갔다"고 회상했다. 이어 "연기 그만두고 애 키우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지금이랑 그때랑 달라졌다. 연기해도 되겠다'고 하시더라"며 "그 말을 듣고 펑펑 울었다. 그렇게 '밀양'을 찍고 나서 다시 연극을 했다"고 말했다.
영화 '우리들' 스틸 / 사진: 엣나인필름, 필라멘트픽쳐스

영화 '우리들' 스틸 / 사진: 엣나인필름, 필라멘트픽쳐스

이후 그는 연극뿐 아니라 영화 '마린 보이', '시', '사랑을 말하다' 등에 출연하며 조금씩 필모그래피를 쌓기 시작했다. 그랬던 그의 인생을 바꾼 건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2015)이었다. '우리들'은 혼자가 되고 싶지 않은 외톨이 선과 비밀을 가진 전학생 지아의 복잡미묘한 여름을 그린 영화로, 표현에 서툴고 사람에 멍든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작품은 윤가은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과 공감 스토리로 국내외 영화제에 노미네이트됐으며, 2017년 '제53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 시나리오상, '제4회 들꽃영화상' 대상을 수상하며 저예산 영화임에도 큰 호평을 얻었다.

'우리들'에서 비중이 크지 않은 엄마 역으로 얼굴을 내비친 장혜진. 현실적인 연기를 보여준 그를 알아본 건 봉준호도 마찬가지였다. 앞서 장혜진은 "봉준호 감독님이 '우리들' 속 연기를 보고 '기생충' 출연을 제안하셨다"며 "그래서 저에게는 '우리들'이라는 영화의 의미가 크다. 제게 많은 것들이 있게 해준 영화"라고 애정을 드러냈다.
영화 '기생충' 캐릭터 포스터-스틸 /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기생충' 캐릭터 포스터-스틸 /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렇게 찍게 된 '기생충'은 장혜진에게 배우로서 생애 한 번도 경험하기 힘든 영광을 안겨줬다. 가족 전원이 백수인 '기택'네 장남 '기우'가 고액 과외 면접을 위해 '박사장'네 집에 발을 들이며 시작되는 두 가족의 희비극을 다룬 '기생충'. 장혜진은 극 중 기택의 아내 '충숙' 캐릭터를 맡아 15kg을 증량,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억척스러운 엄마 캐릭터를 연기했다. 장혜진은 언론시사회 당시 "큰 작품에 큰 역이 처음이었다"며 "제가 긴 호흡을 끌고 갈 수 있을까 걱정되고 부담이 있었다. 한 장면 한 장면 소중하지 않은 신이 없었다"고 눈시울을 붉히며 남다른 소회를 전했다.

연출, 시나리오, 연기 삼박자가 모두 맞아떨어진 '기생충'은 지난해 5월 '제72회 칸국제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종려상 수상을 시작으로, '시드니 영화제', '유라시아 국제영화제', '토론토국제영화제', '뉴욕 비평가 협회상', '골든글로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등 유수의 국내외 시상식에서 수상의 쾌거를 거뒀고, 특히, '미국배우조합상'에서는 최고 영예 부문인 앙상블상을 받았다. '기생충' 성공사의 정점을 찍은 건 2월 열린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이다. 이날 '기생충'은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감독상에 이어 대상 격인 작품상까지 받으며 세계 영화계의 중심에 섰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사랑의 불시착' 스틸 / 사진: KBS, tvN 제공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사랑의 불시착' 스틸 / 사진: KBS, tvN 제공

장혜진의 활약은 스크린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지난해에만 드라마 세 작품에 출연하며 안방극장까지 제대로 물들였다. 최고시청률 23.8%를 찍은 KBS 2TV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는 베일에 쌓여 있던 '박영심'으로 깜짝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박영심은 극 중 옹산 파출소 변소장의 짝사랑 상대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캐릭터로, 장혜진은 이 작품을 통해 안방극장 신고식을 치렀다.

'장혜진 매직'일까. 특별 출연한 드라마도 성공을 거두더니, 연이어 출연한 작품 역시 큰 사랑을 받았다. 장혜진이 현실감 넘치는 가정주부 역으로 출연한 단편드라마 '루왁인간'은 안방극장의 공감을 저격했다는 호평을 얻었고,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최고 시청률 21.7%를 기록하며 많은 이들의 '인생작' 대열에 올랐다.

특히, 극 중 서단(서지혜)의 엄마이자 평양 최대 규모 백화점 사장인 '고명은'을 연기한 장혜진은 북한 상류층 캐릭터를 맡은 만큼 그간 보여줬던 수수하고 꾸밈없는 모습과 정반대의 비주얼로 다시 한번 '인생캐'를 경신했다. 그는 화려한 메이크업과 한껏 볼륨업 된 헤어스타일로 자존심이 센 캐릭터의 외적 면면을 소화했을 뿐 아니라 특유의 말맛으로 작품의 코믹 포인트를 더했다.
공식석상에 등장한 장혜진 / 사진: 조선일보일본어판DB

공식석상에 등장한 장혜진 / 사진: 조선일보일본어판DB

순탄치 않은 연기 생활을 거쳐온 장혜진은 데뷔 20년이 지나고 나서야 빛을 보며 '믿고 보는 배우'로 우뚝 섰다. 21년 차 배우로서는 많지 않은 필모그래피에도 그에게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바로 '밀도 있는 연기'일 터. 때로는 옆집 아주머니 같은 친근함으로, 때로는 억척스러운 엄마로 변신해 존재감을 드러낸 장혜진이 앞으로는 어떤 변신으로 대중을 즐겁게 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글 이우정 기자 / thesta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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