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tvN '시그널' 제공, 김은희 작가가 공개한 '시그널' 13,14,15회 대본(더스타DB)
사인(死因)을 밝히는 법의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싸인’(2011)부터 사이버 세계의 인간관계를 밝혀내는 사이버 수사대원의 활약을 그린 ‘유령’(2012), 대통령의 실종과 암살 위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쓰리 데이즈’(2014), 무전기로 연결된 과거와 현재 형사들이 미제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시그널’(2016)까지. 김은희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포기하지 않는 1%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꿔나간다.”
“사건은 인물들의 삶에 영향을 준다”
“‘시그널’ 시즌2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장르물의 대가라 불리는 김은희 작가는 1부 대본에 들어가기까지 여섯 달의 시간을 할애한다. 자료 조사와 아이템 선정, 시놉의 초안과 대본을 쓰기까지 보통 그 정도의 시간이 소비된다. 1회 대본을 쓸 때 힘듦을 느낀다는 김 작가는 “2년에 한 작품 정도가 적당하다”고 했다. ‘싸인’과 ‘유령’ 때는 두 명의 보조작가와 ‘쓰리데이즈’와 ‘시그널’은 한 명의 보조작가와 함께 작업했다.
“초반 자료조사는 제가 직접 해야 해요. 강력계 형사와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 인터뷰는 녹취록만 보고 감이 잘 안 와요. 질문지를 만들어 가지만, 질문 하다 보면 더 끄집어내야 하는 부분이 있어서 직접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자료조사와 인터뷰가 힘들죠.”
감독과 작가는 초반 자료 조사를 직접 도맡아 했다고. “인터뷰를 해보니 이분들은 재미없다고 생각하시는 이야기들이 저는 재미있었어요. 인터뷰 외에 책도 읽었고요. 어느 정도 틀이 세워지면 그다음부터는 ‘그거 좀 조사해보자’고 보조작가한테 맡길 수 있었죠.” 김 작가는 수사물만 몇 작품 하다 보니 형사, 사이버수사대, 검사 등 전문가들의 도움을 더 쉽게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시그널’은 대도사건과 한양대교 붕괴, 진양 신도시 개발 붕괴를 연결하는 전체적인 스토리 구성을 그린다. 수사물을 시즌제로 다루는 미국 드라마는 주로 회별 에피소드를 그리는 데 반해, 김 작가의 수사극은 작은 사건들을 관통하는 큰 줄기가 있다. “CIS를 보다 보면 사건이 재미있죠. 미드니까. 총, 마약, 마피아를 한국 드라마에 가져올 수는 없어요. 한국적인 정서를 담으려면 한 회보고 감정이 끊기기보다는 중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건이 인물들의 삶과 인생에 영향을 주잖아요. 그러면서 인물들이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맛도 있지 않았을까요?”
화성 연쇄 살인사건, 성수대교 붕괴사건, 대도 조세형 사건,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등 아직도 우리를 아프게 하는 실제 사건들이 ‘시그널’ 안에 녹아있다. ‘미제 사건’이라는 단어의 중압감은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무겁다. 김 작가는 “미제 사건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진범이 잡히는 카타르시스를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실제 사건을 작품에 녹였다.
“대도 사건은 실제 사건처럼 풀 생각이 없었어요. 과거나 현재나 변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면 기득권층의 개인사가 들어가죠. 한영대교 같은 경우도 기득권층만의 잘못이 아닌, 누군가의 부주의와 탐욕으로 인해 부실하게 지어진 다리고, 관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데 결국 상관없는 사람들이 희생한 사건이라서 연관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을 겪으면서 한 인물이 변할 거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까 홍원동 연쇄살인사건 이후 차수현이 진정한 베테랑 형사가 돼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을 것 같단 생각까지 하게 됐어요.”
tvN 편성 전 논의가 오간 지상파 방송사에서는 ‘무전기 설정을 뺐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나왔다는 얘기가 보도되었을 정도로 ‘무전기’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강한 소재다. 김은희 작가는 “무전기가 들어가면 아픔이나 일말의 희망이라도 줄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 무전기를 택했다고 했다.
“무전기를 전지전능한 매개체로 쓰고 싶지 않았어요. 사건 수사는 사람이 해야 하고 사람의 의지와 노력 없이 푼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래서 극 초반부터 무전기의 효능이 아닌 대가를 강조했어요. 회를 거듭할수록 무전기는 재한과 해영을 이어주는,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매개체로 사용했죠.”
‘시그널’의 결말 역시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았다. 권력의 꼭대기에 있는 장영철 의원(손현주)을 처단하지 않았기 때문. “극 안에서 풀지 못한 내용을 인터뷰로 말씀하기 어렵다”고 말문을 연 김 작가는 “감독님과 고민을 많이 했지만 ‘시그널’다운 결말이었다”고 했다.
“과연 그 한방으로 쓰러질만한 권력일까요. 큰 걸 바꾸기 위해서는 더 큰 희망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실 장영철이 어느 정도 데미지를 입은 상태이기 때문에 시작이 될 수도 있고, 청문회가 열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감독님과 얘기한 건 가장 현실적인 얘기였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어느 정도까지 보여주는 게 현실적인가를 생각했을 때 그 정도가 가장 현실적인 얘기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20년이 지났는데 뭐라도 달라졌겠죠?”라는 극중 이재한 형사(조진웅)의 말은 ‘시그널’을 보고 있는 우리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과거가 변하면 현재도 바뀐다”는 극중 대사처럼 진실을 계속 좇는다면 세상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수많은 함축적 의미를 담은 ‘시그널’을 보며 애청자들은 드라마가 끝나기도 전에 시즌2를 기다리고 있다.
“시즌2는 저도 하고 싶어요. 아시다시피 ’시그널’을 뛰어넘는 기획과 아이디어, 대본이 나와야 가능한 일이죠. 감독님과 배우들 스케줄 조율도 필요하고요. 어차피 할 거라면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아서 더 깊게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2년이 지나면 시청자께서 시즌2를 원하지 않을 것 같아요. 잊지 않으실까요?”
김은희 작가는 작가관을 작품에 지속적으로 투영해왔다. 누군가는 외면하고 있을 진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루만지는 그의 작품에 시청자는 위로받았다. “드라마는 장난으로 쓰는 게 아니어서, 죽자고 달려들어도 될까 말까”라며 밝게 웃던 김은희 작가의 모습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친 지금, 김은희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글 장은경 기자 / eunky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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