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1988' 혜리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사진 : 조선일보 일본어판 이대덕 기자, pr.chosunjns@gmail.com
혜리,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찾다
‘응답하라 1988’로 깨달은 5%, 앞으로 95% 채워나갈 것
지난해 11월 진행된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 기자간담회에서 신원호PD는 “성덕선 역할의 모티브로 혜리를 얘기했다. 혜리를 보며 ‘덕선이는 저럴 거야’라고 그렸고, 인기에 맞춰 캐스팅하지 않기 위해 ‘너무 떠버린’ 혜리를 포기했다. 그래도 오디션을 보고 싶었고 ‘덕선이 같은 배우는 해리밖에 없어서’ 그를 캐스팅했다”고 말했다. 신원호PD의 배우 보는 안목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신원호PD와 캐릭터를 잡아가기 전, 혜리가 본 덕선은 입체적인 인물이었다. “예쁜 여주인공, 예쁜 여배우는 많아요. 그런데 덕선이처럼 사랑스러운 캐릭터는 많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망가지고 엉뚱한 모습까지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봐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준비했어요. 덕선이가 착하고 쾌활하지만 마냥 착한 아이는 아니에요. 굴하지 않고 씩씩하면서도 껄렁껄렁하기도 하잖아요.(웃음) 매 순간 어떻게 표현해야 덕선이 같을까를 생각했어요.”
‘응팔’ 대본을 처음 본 혜리는 자신과 닮았다던 ‘성덕선’ 캐릭터에서 확연한 공통점을 찾지 못했다. “예능프로그램 속 네 모습을 모티브로 삼았으니 다시 한 번 관찰해보라”는 신PD의 주문에 ‘진짜 사나이’를 여러 번 보며 스스로도 몰라던 자신을 발견해나간 혜리는 “신PD도 자신도 모르는 혜리의 모습을 찾는 것”으로 합의점을 찾았다.
지금이야 ‘국민 드라마’의 주인공이 됐지만, 시작은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응답하라 1988’은 브랜드화된 시리즈 드라마다. 여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누구나 ‘책임의 왕관’을 짊어져야만 하는 힘든 순간을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응칠’의 정은지, ‘응사’의 고아라를 잇는 새 여왕으로 ‘혜리’가 지목된 순간 환영의 박수만큼이나 의문과 우려도 쏟아졌다. 혜리와 신PD 모두 “첫 회에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 회에서 우려를 기대로 바꾸지 못한 이후 ‘응팔’ 스토리가 좋아도 저의 연기에 신경을 쓰실 것 같아 첫 회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다른 회보다 길게 준비하고, 리딩도 많이 하고 촬영 시간도 길었고 제일 많이 공을 들였죠.”
‘응팔’의 덕선이가 되기 전 혜리는 원작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던 드라마 ‘선암여고 탐정단’(2014)에서 주인공 이예희를 연기했었다.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역할이었고 애착이 갔던 작품이었지만, 대중의 반응은 기대 이하였다. ‘선암여고 탐정단’과 맞물려서 촬영한 ‘하이드 지킬 나’때는 체력 안배가 잘못돼 캐릭터의 구분을 못하는 등 “숙련된 연기자가 아니라”고 생각할 만큼 시간에 쫓겼다.
의욕만으로 연기자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혜리는 ‘응팔’을 준비하면서 “다음 작품에서는 이런 참사를 만들면 안 되겠다”는 굳은 각오로 공을 들였다. 1화부터 혜리=덕선 공식이 생길 만큼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덕선이 너랑 비슷하니까 편했을 거야”라는 오해에 속이 상하긴 하지만, “비슷해서 더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고 차분히 말하는 혜리에게서는 같은 반 친구를 위기에서 지혜롭게 구해내고, 보살핌이 필요한 친구를 따뜻하게 챙기는 덕선이의 모습들이 스며든 듯 보였다.
‘응팔’ 한 작품으로 혜리는 ‘60억 소녀’가 됐다. 남녀노소 혜리를 알고, 혜리를 찾는다. 혜리가 속한 걸스데이의 연이은 흥행과 예능 프로그램에서 소비된 좋은 이미지들도 이에 일조했지만, ‘응팔’로 쾌속 상승해 마침내 인기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응팔’은 혜리를 어떻게 바꿨을까.
“지금은 연기에 대해 5% 정도 알게 된 것 같아요. 대본이나 시나리오를 보는 방법, 캐릭터를 이해하는 방법을 전혀 몰랐는데 ‘응팔’로 조금 알게 됐어요. ‘이렇게 표현하면 봐주시는구나’를 알게 된 점이 제일 커요. 이제 남은 95%를 열심히 채워나가는 게 목표예요.”
캐릭터의 힘은 크다. 당분간은 혜리를 덕선이로 보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혜리는 “덕선이를 못 보낸 분들께는 그 모습을 이어나가야 할 것 같긴 해요. 힘들면 못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 힘든 정도는 아니에요. 그리고 조금만 지나면 (덕선이도) 잊어버리실 거에요”라며 웃었다.
덕선이를 보내도 혜리는 남아있다. 내숭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처럼 먹음직스럽게 음식을 먹고, 함께 있는 사람들까지 웃을 수밖에 없도록 시원하게 웃고, 어떤 역할이 주어져도 최선을 다해 소화해내려는 ‘열일돌’ 혜리는 “있는 그대로의 혜리를 봐달라”고 말했다. 그 어떤 거창한 목표보다, “무언가에 연연하지 않고 꾸밈없는 본연의 모습은 유지하되,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나가겠다”는 스물세 살, 혜리의 일기장에 어떤 행복한 추억들이 채워질지 기대된다.
[인터뷰②] 혜리 "'응팔' 엔딩, 마지막에 바뀌었다? 나조차 혼란스러웠다"로 이어집니다.
글 장은경 기자 / eunky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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