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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서인국 "캐릭터로만 보이는 배우"
배우를 말할 때 떠오르는 캐릭터가 있다. 히트작 속 캐릭터 또는 작품의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캐릭터 말이다. 배우들이 연차를 쌓고 작품 수를 늘려가더라도 ‘인생 캐릭터’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최근 KBS 사극 ‘왕의 얼굴’을 끝마친 배우 서인국의 경우는 좀 독특하다. 배우의 어떤 작품을 좋아했느냐에 따라 시청자가 기억하는 그의 대표 캐릭터가 다르다. tvN ‘응답하라 1997’의 풋풋한 윤윤제, 누나들의 마음을 뒤흔든 tvN ‘고교처세왕’ 18살 이민석과 28살 이형석(1인 2역), 어르신들에게 제대로 눈도장 찍은 KBS ‘왕의 얼굴’까지, 시청자의 마음속에 자리한 서인국은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왕의 얼굴> 준비하며 “사극 틀어놓고 생활”
내 캐릭터 분석은 기본, 상대와의 합은 현장에서
“사극의 어마어마한 매력에 빠졌다. 촬영하다 뒷목 잡기도”
갑자기 앓는 열병처럼 스물다섯 살의 서인국은 위태로웠다.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쌓아두던 그는 그 시기를 슬럼프라 말했다. 켜켜이 쌓인 감정 때문에 스스로도 위험하다고 느낀 그때, 서인국은 운명처럼 KBS 드라마 ‘사랑비’를 만났다. “내가 표현하고 있다는 게 행복했어요. 3개월을 그 캐릭터에 빠져 살면서 미친 듯이 즐겼죠. 그 시기에 연기할 수 있었던 건 되게 운이 좋았죠.” 위기를 기회로 만든 서인국은 조연으로 시작해 주연으로 올라서는 몇 년의 시간 동안 오로지 ‘연기’로 자신의 가능성을 증명해 보였다. 준비돼 있었기에 거머쥘 수 있었던 행운이었다.
“‘왕의 얼굴’은 현대극이 아니라 말투에 대한 익숙함이 필요했어요. 일단 귀부터 터야겠다 싶어서 영어를 공부하는 분들이 미국드라마나 외국 뉴스를 틀어놓고 보는 것처럼 저 역시 드라마를 보든 안보든 사극을 틀어놓고 생활했어요. 요즘 TV는 드라마를 연속해서 보기 쉽잖아요.”
서인국은 어떤 작품을 하던 자신이 맡은 캐릭터의 겉모습부터 성격까지 철저하게 분석하고 연기한다. 이번에는 ‘광해의 성장기’에 초점을 맞추고 겉모습만 봐도 알게끔 ‘광해의 변화’를 표현하는데 집중했다.
“처음에는 젖살 있는 광해의 느낌을 내려고 호기심 가득하고 총명한 느낌을 내고자 했어요. 눈썹을 들고 말하면 사람을 흥미롭게 보잖아요. 말투도 사극을 분석하면서 보니 왕이나 양반을 제외하고는 다,나,까로 끝나는 현대말이었어요. ‘왕의 얼굴’ 속 광해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인물이어서 틀에 박혀있고 싶지 않았거든요. 전란이 터졌을 때는 패기 넘치는, 의병장을 이끄는 장수의 느낌을 줬고 리더십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살을 빼서 날렵한 느낌을 냈죠. 세자가 됐을 때는 닥쳐올 일들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묵묵하게 해결하는 강인한 눈빛을, 왕이 돼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패기가 흘러넘치는 느낌으로 연기하고 싶었어요.”
내 캐릭터는 철저하게 분석하지만, 상대방의 캐릭터는 연구하지 않는 게 서인국의 연기 소신이다. 연기를 시작하며 그는 상대방이 어떤 감정으로 나올지는 현장에서밖에 모르는 건데 상대와의 합까지 준비했다가 낭패를 봤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서인국은 대본과 상황만 알고 리허설을 할 때 상대와 맞춰서 연기하는 스타일로 가닥을 잡았다.
“사실 드라마가 영화처럼 시나리오가 다 나온 건 아닌데 시놉시스에 ‘왕이 될 때까지의 모습이 있다’라고 쓰여 있다면 제가 작가님께 ‘제가 연기할 수 있는 연령대가 언제인지 알려주시면 준비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거죠. 그렇게 준비했고 이번에 머리를 많이 썼어요. 손짓 하나까지 감독님과 작가님을 귀찮게 하면서 하나하나 전부 의논해서 연기했어요. 기억에 남았던 말이 B팀 촬영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감독님이 생각지도 못한 걸 배우들이 가져오면 매우 행복하다고요. 배우들도 똑같거든요. 제가 생각한 걸 인정받았을 때 그보다 더 행복한 게 없어요.”
서인국이 드라마를 끝내고 방송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건 꽤 오랜만이거나 처음으로 알고 있다. 근래에 그가 한 인터뷰는 영화 ‘노브레싱’(2013) 홍보 차 진행했던 인터뷰였다. ‘노브레싱’에 이어 ‘왕의 얼굴’까지 서인국과 두 번의 인터뷰를 진행하며 묘하게 달라진 그의 모습을 감지할 수 있었다. 오늘 만난 서인국은 ‘배우의 얼굴’을 하고 작품에 대해 말하고, 배우 서인국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많이 달라졌죠? 그때 제가 누군가에게 ‘지금은 제가 이렇게 생각하고 성숙해진 느낌인데 또 언젠가는 그때의 제가 어리숙하고 철없을 거라 느껴질 때가 있겠죠’라는 얘기를 했었을 거에요. 지금도 똑같아요. 지금은 그때보다 여유가 생기고 일을 좀 더 즐길 수 있는 노하우가 생겼는데 또 모르죠. 다음 작품을 하고, 또 작품을 하면 지금의 제가 귀엽다고 생각할 지도.”
작품을 끝내고 나면 기나긴 대장정 때문에 성숙해지나 생각했다던 서인국은 “그건 아닌 것 같아요”라며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성숙해지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저는 낯가림은 없지만, 밖을 돌아다니는 성격은 아니에요. 집에서 술 마시는 걸 좋아하고 집에 있는 걸 좋아하죠. 그런데 작품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내 생각이 넓어지고 성숙해지는 걸 느끼게 되니까 점점 달라지는 것 같아요. 내 생각을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잖아요. 요즘 새로운 취미도 찾고 있는데 배우로서, 가수로서의 취미가 아니라 사람들과 섞이고 싶어서 볼링을 할지, 펜싱을 할지, 클라이밍을 할지 고민 중이에요.”
‘집돌이’ 서인국을 집 밖으로 끌어낸 건 ‘사람’이었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서인국은 작품을 할 때마다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가 남달랐다. 차기작에서 만나고 싶은 배우는 누구냐고 물을 때는 어김없이 “ ‘왕의 얼굴’ 팀과 현대극에서 만나고 싶어요. 누아르 장르의 작품에서 제가 나쁜 사람이 돼서 (이)성재 형님과 (신)성록이 형을 괴롭히고 (조)윤희 누나를 뺏으려 하는 내용을 하면 어떨까 싶은 거에요”라며 내 사람 챙기기에 온 마음을 쓰는 식이다.
소중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의 헤어짐은 늘 아쉽기 마련이다. 서인국도 종방연 다음날을 떠올리며 “미친 듯이 놀고 집에 가서 자고 눈을 딱 떴는데 되게 긴 꿈에서 깬 듯한 느낌이었어요. ‘이제야 돌아왔구나’ 하는. 여운이 남는 거에요”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덕분에 그는 첫 사극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마어마한 매력을 찾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왜 타임머신을 만들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아요. 제가 살면서 언제 그 시대를 경험해 보겠어요. 사극은 정말 좋았어요. 물론 매우 힘들고 연기할 때 에너지 소비가 너무 심하다 보니 뒷목을 잡기도 했는데 제가 언제 뒷목을 잡으면서 연기하겠어요.”
서인국은 참 흥미로운 스타다. ‘슈퍼스타K 1’(2009) 우승자로 일반인에서 스타가 됐고, 가수로 시작해 배우로 영역을 확장했다. 그는 역경을 딛고 올라선 가수, 연기 잘하는 기대주로, 또 그가 꿈꾸는 대로 “캐릭터로만 보이는 배우”로 기억되고 있다. 서인국이 연기를 그만두지 않는 이상 대중이 기억하는 그의 ‘인생 캐릭터’는 계속 달라질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가 지금 주연을 할 수 있게 된 건 전부 ‘응답하라 1997’ 때문인 것 같아요. 저의 대표 캐릭터는 윤윤제인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장동민 씨가 나온 방송 캡처 화면에 ‘너는 안경을 꼈어도 예뻤는데 벗으니까 더 예쁘다’라는 자막이 쓰여 있는 거였는데 댓글에 ‘윤윤제?’라고 적혀 있는 거예요. 아직 윤윤제가 기억된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거든요. 사람들의 뇌리 속에 박혀 있는 캐릭터가 있다는 건 ‘히트곡’과 비슷한 거잖아요. 제가 연기했던 여러 캐릭터가 사람들에게 인식됐다는 게 정말 행복해요.”